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리드리히 니체 (문단 편집) === 양심과 도덕 === 니체의 윤리학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이는 그의 작품 『선악의 저편』에서 주로 다뤄지지만, 니체 철학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이다. 양심의 정의에 관해서 니체는 독특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 그는 [[몸철학]] 관점에서 접근하는데, 양심을 몸(뇌신경계)에서 욕망하는 것을 '일반화'한 법칙으로 여긴 것이다. 때문에 니체 입장에서는 그 본질이 유아적이다.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돈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십계명의 예를 들자면 이렇다. >살인을 하지 말라 = 살해당하는게 두려우니까, 모든 사람이 하면 안된다고 일반화한 것. > >도둑질을 하지 말라 = 남에게 빼앗기는게 싫으니까, 모든 사람이 하면 안된다고 일반화한 것. > >간음을 하지 말라 = 배우자가 바람피는 것이 싫으니까, 모든 사람이 하면 안된다고 일반화한 것. 다만 니체는 양심이 몸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몸이 바뀌기 전에는 거부할 수 없다고 본다. 내 양심을 부정한다는 것은 나의 욕망을 부정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이다. 그래서 양심을 부정할 수는 없다. 양심은 가치 판단과도 연결된다. 『도덕의 계보』에 따르면, 자기 욕망에서 비롯된 양심에 일치하는 것을 보면 사람은 만족하고, 심지어 존경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구걸하는 거지를 내가 동정한다. >-> 적선을 해서 내 마음을 달랜다. >-> 누군가가 대신 적선을 해도 내 마음이 편해진다. >-> 적선한 사람에게 호감을 느낀다. 가 된다는 것이다. 타인을 [[호오]], 선악 등으로 평가하는 것도, 내 감정과 유용성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 사람 자체가 존경스럽기 때문에 존경하는 게 아니라, 나의 양심/가치관과 일치하기 때문에 존경하는 것이다. 내 입맛에 따라 달라지는 음식 취향과 같다. 이 맥락에서 니체의 문제의식은 그의 [[데카르트]] 객관론 비판으로 이어진다. >주관성 vs [[객관성]] 니체의 관점주의에 따르면 '그 자체로 객관적인 것'은 없다. (또는 인식할 수 없다.) 사회의 합의에 따라 '객관적인 것으로 인정된' 것만 있을 뿐이다. 때문에 객관론, [[절대주의]]자와 같이 삶에 딱 하나의 정답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의 진리를 너도 믿어라"하는 강요와 다름이 없다. 니체는 이 시각에서 양심과 도덕을 구분한다. >[[주관적]] 진리 vs [[객관적]] 진리 = >주관적 가치 vs 객관적 가치 = >양심 vs 도덕 즉, 도덕 또한 우리의 양심을 너도 따라라! 하는 강요에 불과하다. 때문에 니체의 윤리학에서는 남을 도덕적으로 판단하는 사람이 가장 큰 악인이다. 우리의 양심으로 남의 양심을 향해 폭력을 휘두르는 독단성의 폭군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그래서 도덕주의자를 깊이 혐오한다. 도덕의 본질은 '양심의 객관성을 구성원들에게서 끌어내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끌어내는 척도가 객관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무엇이 객관적인지 파악하는 것조차 주관이 섞여있는 것이다. 시대에 따라, 국가에 따라, 지역에 따라, 민족에 따라 양심의 척도가 다르다. 따라서 양심의 객관화란 너의 A 양심, 나의 B 양심을 모두 꺾고 타협해서 임의로 발명된 AB 도덕으로 가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도덕이란 그 누구의 양심하고도 완전하게 맞지 않는 것이다. 도덕은 사람들의 양심을 일반화한 개념이다. 그래서 도덕을 따르는 사람들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가 자신의 양심과 크고 작게 어긋난다고 느낀다. 모두 다 같이 서로가 서로를 억압하는 것이다. 결국 도덕은 모두의 개성과 양심을 억압하는 질서다. 니체가 도덕을 포함한 모든 객관론을 '폭군' '노예' '천민' 등으로 부르며 만악의 근원으로 취급하는 이유다. 니체의 궁극적 해결책은 결국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이다. 나의 양심은 곧 나의 진리다. 너의 양심은 곧 너의 진리다. 서로의 진리가 다르다는 것은 각자 몸(뇌신경계)에서 나오는 욕망이 다르다는 것이다. 욕망은 우리가 각자 삶의 기쁨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다른 진리, 욕망을 마주할 때 경멸감을 느낀다. 나의 삶이 부정당하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경멸감은 내 몸이 자기보존을 위해서 뿜어내는 스트레스 호르몬 따위의 것이다. 합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소중하다. 그로 말미암아 나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래서 니체는 "비진리를 용인하자"고 제안한다. 니체에게 진리란 내 몸에 기반해 형성된 것으로 나만의 편견이 담겨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맹신하는 독단성에 빠지지 말자는 것이다. 나의 진리는 나에게 최고의 것이지만, 남에게는 그렇지 않다. 나는 나이고, 너는 너이다. 이 '독단성'에 빠져버리는 문제를 니체는 시적으로 '[[심연]]'이라고도 표현한다. 이 심연에 빠지지 않는 방법은 초인 또는 [[위버멘쉬]]의 핵심 주제이기도 하다. >그대들의 눈은 언제나 '그대들에게 걸맞은' 적을 찾고 있어야 한다. 그렇게함으로써 그대들 가운데 몇 사람은 첫눈에 증오를 느낀다. 그대들은 자신의 적을 찾아내야 한다. 그대들의 사상을 위해서 싸워야만 한다. 만일 그대들의 사상이 패배한다 해도 성실성은 승리의 소리를 외쳐야 한다. 그대들은 오직 새로운 싸움의 수단으로서 평화를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오랜 평화보다도 짧은 평화를 사랑해야 한다. 나는 그대들에게 노동이 아닌 전투를 권한다. 평화를 권하지 않고 승리를 권한다. 그대들의 노동은 전투여야 하고, 그대들의 평화는 오직 승리여야 한다. (...) 그대들은 다만 미워해야 할 적을 만들어야 한다. 경멸해야 할 적은 만들지 말아야 한다. 그대들은 적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적의 성공이 그대들의 성공이 되기도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곽복록 옮김, 1부-전쟁과 전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